타 종교에 대한 다양한 입장
1. 배타주의
자기가 믿는 종교와 다른 일체의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참 종교가 있다면 진리는 오직 하나이어야 하며, 자신이 믿는 종교가 참 종교인 이상 다른 종교는 참일 수 없다고 본다.
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기독교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자들, 매우 열광적인 경건주의자들, 헌신적인 전도, 선교 신학자들, 조선조 말의 유교적 지배 엘리트들, 유대교 바리새주의자들과 그 엘리트 민족종교주의자들이다.
이들이 가지는 뜨거운 신앙적 신념, 선교열정, 종교적 희생정신,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실성 등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배타적 태도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우선 이들의 진리관이 매우 소박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진리 인식의 상대성과 역사성에 대해서 거의 무지하다. 그들은 흔히 신의 직접적 계시적 진리 위에 그들의 신앙과 종교체계가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절대적인 종교 진리의 주장에는 오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의 계시 그 자체’는 절대적이더라도 그 계시가 인간에게 응답되고 체험되는 순간부터는 이미 역사성에 접촉되고 일정한 해석학적 패러다임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이해, 해석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진리 경험’, ‘구원 경험’을 독점하고 있다는 오만과 자만에 빠진다. 그들의 자만심은 타종교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결여하여 흔히 타종교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편견을 지니거나 자기중심의 해석을 함으로써 자기의 교리적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사용하고 만다. 그들은 ‘절대자’의 무궁하심과 신비하심과 절대 초월적 자유를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자기의 붓대롱으로 보는 하늘만이 하늘이라고 강변하는 우를 범한다.
2. 포용주의
배타주의적 입장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을 자작하고, 그 단점을 극복하면서 타종교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포용적, 포괄적 태도를 견지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인간이 문화적 존재이며, 역사적 존재라는 점을 충분히 자각하면서 진리 체험을 다른 문화와 역사 속에서도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진리 그 자체는 어떤 역사적 종교보다 크며, 어떤 역사적 구원 교리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점을 인지한 성숙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이다. 내가 믿는 종교만이 아니라 타종교 안에도 윤리, 예술,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면에서 훌륭한 가치들이 있다는 것과 필요한 경우 그것들에서 어떤 점에서는 참고할 용의도 있다는 자세를 견지한다. 지구촌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있는데, 배타적 태도는 오직 분쟁과 종교전쟁만을 유도하는 것이므로 서로 종교 간의 대화를 강조하고 협동하여 공동선을 추구해가야 할 것을 다짐하는 진보적 종교인들, 개방적 자세를 지닌 종교인들이 취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포용주의적 태도는 타종교에 대한 관용성과 개방성과 협동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자기 종교에 대한 우월성과 완전성에 대한 확신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간의 대화나 협동을 저해한다는 사실이다. 포용주의는 타종교에 대하여 관용정신과 대화정신을 견지하지만, 자기가 믿는 종교가 가장 완전하고 우월하다는 것에 대한 신념을 지니기 때문에 자기 종교, 자기 신앙은 더 이상 창조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해 갈 필요가 없다는 자만심에 빠지기 쉽다. 타종교는 자기 종교 안에서 이제 완전해져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자기가 믿는 참 종교 안으로 흡수 통합되어야 한다는 흡수 통합론을 은폐하고 있는 입장이다.
3. 평행주의(병존주의)
세계 안의 다양한 종교들은 마치 언어가 다양한 것처럼 서로 다른 문법체계에 의한 종교 이야기이므로 근본적으로 서로 대화나 교류가 가능한 것도 아니고, 어떤 한 종교를 척도로 해서 다른 종교를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각자 자기의 길을 가자는 주장이다. 타종교에 대한 정복적 태도나 비판적 태도나 우월주의적 태도가 무의미한 것처럼, 협동이나 대화나 상호영향이라는 기대도 관용성을 가장한 헛일이라는 입장이다. 평행주의는 도리어 잘못된 대화나 만남이 종교에 치명적 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혼합주의나 절충주의를 지원하게 되어 종교의 힘을 근저에서 파괴시키는 원인을 제공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남에게 영향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는 종교적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매우 소박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정신 문화사를 좀 더 깊이있고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종교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자기의 길을 더욱 새롭게 발전시켜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인도의 불교는 중국에 기원후 1세기에 전래되어 와서 노장사상과 중국적 정신토양에 토착화됨으로써 인도 불교와는 다른 중국적 불교의 특성을 나타내면서 동북아시아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대적 기독교는 헬레니즘의 정신문화 속으로 토착화 되면서 역사적 기독교를 이루어 갔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불교가 불교 아닌 것이 아니며, 유럽 기독교가 기독교가 아닌 것이 아니다.
4. 다원주의
종교 다원주의는 위의 세 입장의 문제점을 충분히 인지하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신학계와 종교계에 등장한 입장이다. 이 입장은 종교적 구원의 길은 문화 역사적 다양성에 의해서 여러 가지의 길이 존재할 수 있으며, 어떤 한 가지 규범을 가지고 다른 구원 체험의 길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서로에게 배우며 창조적 변화의 모험까지를 두려워하지 말자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인간은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의해 근원적으로 제한받고 영향받는 존재라는 것을 깊이 자각한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종교혼합주의를 경계한다. 이것은 각각의 종교는 각각 자기 특성을 지켜가야 하며, 자기 종교의 깊은 차원에 도달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간의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자기 종교의 깊은 샘에서 생수를 마신 사람은 타종교에 대한 우월감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타종교들과 만나고 대화 협동하는 가운데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거나 자기 신앙이 변질되어 버릴까 염려하지 않는다.
종교 다원주의는 보편적 진리는 구체적 진리 체험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경험된다는 것을 안다. 위대한 예술가나 성자의 초상화는, 그리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각각은 그 초상화 주인공의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종교란 진리에 대한 사진 같은 것이 아니고 초상화 같은 것이라고 본다. 모든 초상화는 각각 그 고유한 개성을 지니면서 그 초상화 주인공을 나타내지만 어느 초상화도 그 주인고의 전부를 다 묘사해 내지 못한다.
종교 다원주의 이론에는 몇 가지 모델이 있다.
1) 시각적 모델 : 산정에 오르는 등산로는 여럿 있을 수 있다. 산정에 오르는 등산로가 다르면 등산가에게 비취는 산세와 풍광이 다양하듯이, 이들 종교의 ‘궁극적 실재’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고(브라만, 야훼, 하느님, 한울님, 도(道), 존재 자체 등등), 종교간의 체험과 견해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신의 이름과 구원에의 길이 다양할지도, 진정한 종교인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곧 ‘자기중심적 존재’가 변화하여 더 크고 넓은 ‘실재중심의 존재’ 다시 말해서 하나님 중심적 존재, 진리 중심적 존재, 생명 중심적 존재, 자비와 사랑과 인(仁)을 위해 헌신하는 이타적 존재로 변화된 삶을 살아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2) 물리학적 모델 : 물방울 프리즘은 백색 광선을 일곱 색으로 나타내 보인다. 인류의 다양한 종교적 체험, 종교의례, 상징과 신화, 교의와 신학체계, 그리고 경전들을 비유해 보자면, 백색의 광선이 공중의 물방울에 의해 굴절되면서 빛의 파장에 따라 다양한 색상이 나타나는 무지개와 같다. 지구 인류문화사 속에 있는 다양한 종교들도 ‘백색광선’에 해당하는 ‘궁극적 실재’가 인류의 문화-역사적 프리즘에 굴절 반사되면서 만들어 내는 다양한 빛깔의 색상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델은 ‘종교간의 대화’가 단순히 종교와 종교 사이의 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내의 대화’가 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예를 들면, 평소엔 인격적이고, 초월적이고, 역사적인 신관을 가지고 생활하던 어느 그리스도인이 좀 더 존재론적이고, 내재적이고, 초인격적인 진리관을 가진 불교도와 깊은 대화를 나눌 때, 후자의 진리 체험이 전혀 낯선 체험이 아니라 내 속에 있었지만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진리 체험의 요소임을 자각하면서 그의 신관은 그만큼 더 넓어지고 깊어지게 된다.
3) 기하학적 모델 : 기하학적 도형과 입체물은 겉모양은 다르나 같은 위상에 있을 때 같은 자료의 변형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고무풍선은 둥근 모양도 있고, 원추형도 있고, 비비꼬아서 아예 형태를 바꾼 나비넥타이 모형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고무풍선은 겉모양과 형태가 다를 뿐 같은 위상에 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역사적 종교들은 근원적인 인류의 종교경험, 원 경험의 변형된 형태와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 종교들을 외부 형태 차원에서 비교하면 전혀 통하지 않고 공통점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위상 상수처럼 서로 본질적으로는 상호 관계되고 상호 이해될 수 있다.
종교의 진면목은 심오한 이론이나 우주의 원리에 대한 철학적 통찰보다는 현실적 인간 고통 문제에 직면하여 생명을 치유하고 살려내려는 실천적 자비심이나 사랑의 봉사에 있다고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종교의 실천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의 비유를 든다.
즉, 독화살을 맞아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서, 그 화살을 쏜 범인 색출이나 그 독의 화학적 분석을 연구하는 일이 일차적이 아니라, 독화살을 맞고 신음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우선 독화살을 몸에서 제거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먼저 해야 하며, 이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이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나 길에서 신음하는 사람을 그 사람의 종교가 무엇이냐를 묻기 전에 무조건적으로 우선 돌보아 그 생명을 살려내는 일이 선한 일이라고 가르친다.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는 이론적 측면 못지않게, 현실적으로 진지한 생각을 해보아야할 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현대 인간의 삶은 복잡하게 서로 연관되고 유기체적으로 얽혀서 영위되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종교를 지닌 사람들의 활동과 봉사를 힘입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지구촌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의 문제에서 종교 다원주의는 어느 종교가 더 바른 종교 진리를 가르치고 있느냐를 다룰 것이 아니라, 어느 종교가 선을 행하는 일에 더욱 실천적으로 노력하며 타종교와도 협력하느냐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와 사랑, 생명과 정의 같은 실재는 역사적 종교들의 전통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큰 모든 종교들의 공동지반이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란 바로 그런 신념을 지니고서, 자기가 믿는 신앙에 진지하고 성실하면서도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선한 일에 협력하면서, 자기 종교 진리 체험의 지평을 확대, 심화해 가는 사람 곧 열린 종교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김경재 교수의 [문화신학담론]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