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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3 가지 오해와 진실

  • admin
  • 19.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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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3 가지 오해와 진실


마가복음 12장은 사두개인과 예수님 사이의 부활에 관한 논쟁 기사를 싣고 있다. 한 여인이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한 경우를 예로 들면서 만일 부활한다면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될 수 있겠느냐며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두개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24절), “크게 오해하였도다”(27절)는 말씀으로 책망하셨다. 평소 성경 특히 모세오경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사두개인들이었지만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신자들은 부활에 대해 아무 오해 없이 바로 알고 제대로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신자들도 부활에 관한 몇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그 중에 세 가지를 든다면 첫째, 부활의 방법에 관한 것, 둘째, 부활의 시기에 관한 것, 셋째, 부활의 몸에 관한 것이다.


1. 하늘에 간 영혼과 땅에서 부활한 몸이 재결합한다는 오해


신자들은, 죽게 되면 몸은 부패돼 소멸하지만 영혼만은 불멸적인 존재라서 하늘에 올라가 복락을 누리며 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에 올라 간 영혼은 몸 없이 안식하다가 역사의 마지막, 곧 예수님의 재림 때 땅에서 부활한 몸과 재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사람이 되어 새 하늘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맞는 부분도 있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모두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신자가 죽으면 하늘에 간다는 것은 맞지만 영혼만 간다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 때에 하늘에서 안식하던 영혼과 땅에서 비로소 부활한 몸이 재결합하는 것은 성경에 암시조차 나타나지 않으므로 완전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죽은 후 하늘에서 안식하는 것은 영혼만이 아니라, 영혼과 몸을 다 구비한 완전한 사람(全人)이라고 해야 한다.


죽은 후 불멸의 영혼만으로 하늘에서 산다는 사상을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부활론으로 가르쳐왔고, 우리나라 장로교도 그렇게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사상이 아니라 헬라 철학에 연원을 둔 비성경적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생각의 기저에는 인간이 불멸적 영혼과 사멸적 육체의 몸이라는 두 가지 구성 요소로 이뤄져 있고, 죽으면 분리된다고 말하는 이분법적 인간론이 있다. 이것은 헬라 철학이 기독교에 남긴 가장 큰 부정적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헬라 철학은 영혼은 거룩하고 선한 것인 반면 몸은 불결하고 악한 것으로 보았다. 영혼이 신에 의해 벌을 받아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을 이생의 삶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헬라 철학은 불멸의 영혼이 몸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을 궁극적인 구원으로 여겼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영혼과 몸을 이분법적으로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영혼과 몸을 구별해야 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영혼과 육체, 모두 인간 전체를 가리킨다. 인간을 영혼과 몸으로 나눠서 보는 분인(分人) 개념이 헬라 철학적 개념이라면, 성경의 인간론은 전인(全人) 개념을 갖는다. 몸이라 칭할 때 그것은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지, 영혼을 제외한 반쪽만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혼도 마찬가지로 전인 개념이지 몸을 제외한 반쪽을 가리키지 않는다.


몸에 대한 가치 평가에 있어서도 성경은 헬라 철학과 완전히 다르다. 성경은 헬라 철학과는 달리 몸을 천한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존재로 본다. 그래서 성경은 결코 몸이 없는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죽음 후에 사람이 계속 존재하려면 영혼만이 아니라 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몸의 부활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장 큰 종말론적 희망이다.


하늘에서 영혼만 살고 있다는 주장이 잘못됐다는 근거로 가장 유력한 성경은 요한계시록 6:9-11이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신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그 영혼들이 몸이 없는 존재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이들을 몸 없는 영혼만으로 공중에 부유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의 영혼들은 ‘죽은 자’를 가리키는 전인(whole man)으로서의 영혼이지 ‘몸이 없는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영혼만 하늘나라에 간다는 사상이 잘못이며 성경적인 교리가 아니라는 것은 몸의 부활 시에 하늘에 있는 영혼과 땅에서 부활한 몸이 다시 결합한다는 언급이 성경에 전혀 없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혼만 하늘나라에 간다면 장차 땅에서 부활한 몸과 재결합해야만 하는데, 성경에서는 그 근거를 결코 찾을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진리라면 그렇게 중요한 진리를 신약성경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주장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 몸은 죽지만 영혼은 살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며, 또 하늘에 있던 영혼이 장차 땅에서 부활하게 될 몸과 재결합하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영혼 불멸론적 부활 사상은 신약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또 초기 교회 시대 지중해권을 지배했던 헬라 사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큰 오해에 불과한 것으로 단정할 수 있다. 만약 죽은 후 영혼이 하늘에 가 있다면, 거기에는 영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몸도 함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2. 역사의 마지막에 비로소 부활한다는 오해


사람이 죽으면 언제 부활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역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역사의 마지막,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신자는 부활하고 산 신자는 그 몸이 영광스럽게 변형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죽은 자의 부활 시기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모두 포괄한 대답은 아니다. 성경은 부활의 시기에 대해 다르게 말씀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곧 신자는 죽을 때 곧 바로 부활한다는 것을 말씀하기도 한다.


죽은 자들은 현재 모두 똑같은 운명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 가운데 어떤 자는 잠자는 상태에 있고, 어떤 자는 음부에서 고통 받는 가운데 있고, 또 어떤 자는 이미 주님과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그들은 어떤 상태인가? 그들은 몸 없는 영혼만으로 존재하지 않고 몸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몸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활의 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곧 그들은 이미 부활해서 주님과 함께 있다.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기 전 주님과 함께 있는 그들은 이미 부활한 성도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영혼만 아니라 몸, 부활체를 가지고 있다. 이는 역사의 마지막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활한다는 견해가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견해라고 오해하는 것을 막는다.


성경은 예컨대 이 땅에서 순교적 삶을 산 신자들은 죽을 때 부활한다고 가르친다. 고린도후서 5:1-4을 보자. 1절에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했다. 여기서 땅에서 무너지는 장막 집은 우리의 몸을 가리키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부활의 몸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부활의 몸을 입을 때가 언제냐 하면,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명기돼 있지는 않지만, 장막집이 무너지는 바로 그때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만일 죽은 즉시 부활하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부활하게 된다면 무언가 그런 암시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상 하늘에 있는 부활체를 덧입게 되는 때는 죽고 나서 그렇게 긴 시간이 경과하지 않은 때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덧입는다”(2, 4절)는 말씀이 두 번 반복되고, “벗고자 함이 아니라”(3, 4절)는 말씀이 두 번 반복된다. 두 번 반복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임을 암시한다. 그 중요한 사실, 즉 ‘벗지 않고 덧입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벗은 상태를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벗은 상태란 헬라 철학이 말하는 영혼만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헬라 철학을 잘 알았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가 헬라 철학과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덧입는다”는 표현도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입은 것 위에 또 입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입음으로써 벌거벗은 상태는 잠시라도 발생되지 않게 된다. 현세의 몸 위에 부활의 몸을 덧입는 것이고 그 결과는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4절)이라고 했다. 죽을 것은 현세의 몸이고, 생명은 부활의 몸이다. 죽을 때에 부활의 몸을 덧입음으로써 곧바로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감을 가리킨다. 죽을 때에 부활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 날 이전에 이미 부활해 주님과 함께 거하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음을 안다. 그러면 성경에 그들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이 있을까? 의외로 신약성경은 이에 대한 많은 기사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소위 변화산상에서 예수께서 변형되셨을 때의 일이다(막 9:2-8). 그때 엘리야와 모세가 산 위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세 제자가 목격했다. 베드로는 즉석에서 제안하기를,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베드로가 몸으로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봤다는 것이다. 1000여 년 전에 죽은 모세가 몸으로 나타났다면 이미 부활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고린도후서 5장에 기록된 이 사건이 반드시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역사의 마지막 날,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비로소 부활하는 사람들에 관해서도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가 죽으면 곧바로 부활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활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침해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각 사람을 언제, 어떤 모양으로 부활시킬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필자는 부활의 시기에 대해 성경에 있는 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죽음과 동시에 부활하게 된다. 그들은 죽을 때 곧바로 부활의 세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된다. 순교자들과 같은 참된 신자들이 여기에 속하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죽은 후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잠자는 상태로 있다가 그때에 비로소 부활해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누가복음 16장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처럼 죽은 후 음부에서 고통 당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함으로써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모두 수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죽은 자는 역사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에 부활한다는 진리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에 많은 유익을 준다.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역사의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도 도움이 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무덤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위축시킬 것이다. 바울처럼 이 몸으로 더 사는 것보다 죽어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고백하려면(빌 1:23) 죽을 때 부활한다는 믿음보다 더 적합한 가르침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고 또 성경이 그렇게 가르친다면, 그리고 그것이 더 유익한 교리라면 우리가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죽을 때 얻는 부활이 더 좋은 부활(히 11:35)일 것이다.


3. 현세의 몸의 물질이 변화돼 부활체가 된다는 오해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몸과 현세의 몸과의 물질적인 연관성을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몸을 구성하던 물질이 변화돼 부활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현세의 몸의 세포가 장차 부활체의 세포가 된다는 것이다. 부활체를 현세의 몸이 신령하게 변화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가르침일까?


우선 이런 생각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화장(火葬)을 기피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시신 기증이나 장기 기증 등 현대의 생명 나눔 운동에 있어서도 걸림돌이 됨을 지적하고 싶다. 화장으로 몸이 소멸되면 부활의 재료가 되는 몸이 손상됐으니 장차 어떻게 온전히 부활할 수 있겠는가 걱정한다. 또 시신을 기증한다든지, 내 장기가 남의 장기가 되면 부활할 때 재료가 부족해지지 않을까 걱정될 수 있다.


이런 걱정은 고대 교회에서도 있었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나무꾼과 호랑이, 그리고 사냥꾼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나무꾼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호랑이에게 잡히는 불행한 신세가 됐다. 호랑이가 그 나무꾼을 통째로 잡아먹었으니, 나무꾼의 몸은 호랑이의 몸을 구성하게 됐다. 얼마 후 사냥꾼이 그 산에 사냥하러 갔다. 사냥꾼은 호랑이를 만났고, 활을 쏘아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나무꾼을 잡아먹은 바로 그 호랑이였다! 사냥꾼은 그 사실을 모르고 호랑이를 잡아서 불에 구워서 맛있게 먹었고, 그 결과 원래 나무꾼의 몸이었다가 호랑이의 몸을 구성했던 어떤 부분은 이제 사냥꾼의 몸의 일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질문이 발생한다. 그 일부의 몸은 장차 부활의 때에 누구의 몸이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일견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곤혹스럽게 만들려고 지어낸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 이 이야기를 소개한 고대의 신학자는 이와 같은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일축했다. 그에 따르면 현세의 몸과 부활체 사이에는 물질적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즉 현세의 몸을 구성했던 물질이 부활체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세의 몸과 부활체 사이의 물질적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은 생물학적 견지에서도 인정된다. 세포는 종류에 따라 짧은 것은 며칠에서부터 긴 것은 개체의 수명만큼 살기도 하지만, 뼈를 포함한 우리 몸의 거의 모든 세포는 4년 안에 다시 교체된다. 그러니까 현재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길게 봐야 앞으로 10년 후에는 거의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즉 현재의 몸과 10년 후의 몸은 물질적으로는 99% 다른 몸인 것이다. 무슨 뜻인가? 현세의 몸조차도 이처럼 서로 물질적 연관성을 말할 수 없는데 하물며 어떻게 현세의 몸과 부활체 사이의 물질적 연관성을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으로서 우리는 현세의 몸과 부활체 사이에는 적어도 물질적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에 “땅에 속한 형체도 있고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다”(15:40)고 했으니 현세적 실존을 위한 몸과 영적 세계에서의 실존을 위한 몸은 물질적으로는 다를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부활체는 이 세상의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지어진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것을 가지고 창조해 주시는 것으로 봐야 한다. 고린도후서 5장에는 부활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1절)이라고. 부활체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하늘에 있는 집이다. 또 2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라고 했다. 부활의 몸은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체를 현세의 몸과는 물질적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화장하거나 장기와 시신을 기증하는 것, 몸의 일부가 심하게 손상돼도 부활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며, 부활체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4. 결론


이상을 요약하면, 신자가 죽으면 몸 없는 영혼만 주님 계신 곳에 가는 것이 아니며 그 영혼이 장차 땅에서 부활하는 몸과 재결합하는 것도 아니다. 몸 없는 영혼만의 실존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영혼만이 아니라 전인(全人)으로서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된다.


신자는 역사의 마지막 때에 비로소 부활하는 것만이 아니라 죽을 때 부활할 수 있다. 순교자들은 이미 그런 부활을 얻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이 더 나은 부활이다. 이 가르침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 세상에서 더욱 더 의롭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부활체는 원칙적으로 이 세상의 물질로 구성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주신다. 반드시 현세의 몸이 부활체로 변형된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화장이나 장기이식이나 시신 기증을 꺼릴 것도 없다. 신체가 손상돼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부활체는 하늘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예비돼 있기 때문이다.


[목회와 신학]에서 발췌 (최태영 영남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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